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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을 대처할 수 있는 힘 조직신학

ssil 2021. 2. 21. 23:37

조직신학 이라는 안경

앞으로 최소한 30회 이상 성경을 읽는 특별한 안경에 대해 이야기 해 보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낯설어 하는 < 조직신학 > 이라는 안경입니다.

이단의 미혹이 거센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단의 거짓 가르침과 미혹이 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바른 신학과 교리의 무장은 가장 기본이 되는 이단 대처법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조직신학은 목회자나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 계획과 목적을 제대로 알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해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얼마나 뜨겁게 신앙 고백을 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때문에 우리가 조직신학의 눈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안경을 탑재한다면 그것은 2,000년 교회 역사의 뜨거운 심장을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2020년 1월 출간된 단행본 <조직신학의 눈으로 읽는 성경>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며 코로나19와 신천지로 그 어느때보다 어려움에 처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많은 이들의 헌신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자, 그럼 첫 번째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조직신학이 왜 필요할까?

많은 현대의 신학자들이 걱정하듯이 사탄의 전략은 나날이 교묘해집니다. 어떠한 교묘함인가? 과거 1세기 로마 시대처럼 ‘교회 밖’으로부터 대대적인 박해는 없지만 ‘교회 안’에 훨씬 치명적인 독소를 심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소하게 만드는 사탄의 전략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정면으로 공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사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이러한 사탄의 전략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합니다. 

“무슨 소리? 지금도 수많은 교회들이 있고, 대형교회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고, 이렇게 말씀이 풍요로운 때도 없는데요?

네 물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곳곳에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게감 있게 불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모르시겠다구요? 그렇다면 구약의 사건 하나를 통해 비추어보겠습니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사무엘상 4:3)”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알 수 있는 혼란의 사사 시대

우리가 견주어 볼 사건은 사무엘상 4장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장면입니다. 

사무엘상 4장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는 기록상 조금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전쟁 이야기인데 전쟁의 기본 요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군사력이나 전략, 전술 등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의 관심은 ‘전투와 전략’보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전쟁의 기록은 이렇다 할 전투력 비교도 없이 이스라엘의 패배를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은 왜 진거야?’싶지만 사실 이 전투는 하나님을 우습게 여겨온 이스라엘의 누적된 죄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삿 21:25) 행하다가 극도의 혼란함에 빠졌던 ‘사사 시대’. 그 혼란함을 그대로 이어받아 계시에 어두워져 가던 제사장, 그리고 제사를 우습게 여기던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사무엘상 4장이 있기 전 이스라엘의 모습은 분명 하나님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제사도 있었고 그를 위한 종교적 지도자도 있었으나 하나님은 진중한 경배의 대상도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사소하게 취급받으신 하나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는 이러한 죄가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자! 이러한 패배 속에 이스라엘이 보인 모습은 무엇입니까?

앗! 언약궤를 들고 나가자고 합니다. 그들은 첫 번째 패배 이후 2차전을 준비하면서 다부진 결정을 내린 듯합니다.

하나님을 사소하게 취급한 이스라엘인들

…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사무엘상 4:3)

이스라엘은 각성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선두에 놓고 전투에 임하고자 합니다. 대반전이 기대됩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메고 당당하게 나간 이스라엘은 1차전보다 7배에 달하는 큰 피해 속에 대패합니다.

아니 이정도 신앙의 표현을 했는데 왜 이런 처참한 결과가 왔을까요? 겉보기와 달리 실상은 여전히 하나님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언약궤를 멘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승리를 위한 부적으로 여긴 것에 불과합니다. 언약궤를 메고 나간 그들에게 하나님은 ‘왕’이 아니라 승리를 가져다줄 전략적 도구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전혀 다를 것 없는, 불손한 모습입니다. 선한 왕이요, 구원의 아버지로 오신 하나님을 이렇게 도구 취급하는 것은 경멸 그 자체였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이 하나님을 사소하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조직식학, 이 조직신학으로 우리의 모습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교회는 수도 없이 많고, 인터넷으로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를 골라들을 수 (겉보기에) 풍요로운 모습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속을 찬찬히 들여다봅시다.

하나님은 주일 하루, 개인적인 믿음의 대상으로만 자리하고 있고 공적인 자리와 우리의 일상에는 빠져있지 않은지. 그리고 우리의 신앙은 삶의 절대적 가치로서가 아니라 교양활동으로 전락해 버리지는 않았는지.

제임스 패커_성공회 사제이자 복으주의 신학자

우리는 다윗을 통해 용기, 리더십, 우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만, 정작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가르치지는 않는다’ - 제임스 패커 James Packer

제임스 패커James Packer의 지적대로 ‘우리는 다윗을 통해 용기, 리더십, 우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만, 정작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가르치지는 않는다’고 할 만큼 우리에게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메시지가 아니라 일반교양이자 단순한 도덕책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하나님의 이름은 무게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다음의 해법으로 나가야 합니다 

자기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진리를 배워 바른길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신앙의 선배들은 교회 역사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방편들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소견과 성향대로 성경을 보지 않고, 곁길로도 가지 않도록 성경 배우고 읽을 수 있는 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고백이요, 교리요, 또한 신조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고백과 교리를 집대성하여 하나님에 대해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학문이 이른 바 < 조직신학 > 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학문 _ 조직신학

성경이 절대 진리로 인정받지 못하고 교양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린 이 시대에, 삶의 중심이자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마음과 지성을 다하여 연구한 이 결과물들은 모든 성도에게 필요한 영적 기틀입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에게 성경 전체를 보는 해석의 틀과 개인이 스스로 파악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안전한 해석의 뼈대를 제공함으로써 개인과 교회가 일관성 있는 믿음의 내용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만큼 조직신학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과 진리를 선명하게 해주는 모두의 안경입니다. 

자! 오늘의 주제는 이것으로 마무리하면서, 기대되는 다음의 주제는 ‘조직신학의 눈으로 성경을 읽으면 실제로 어떤 효용성이 있는가?’ 룻기를 통해 실제적인 활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직신학의 눈으로 본 성경 도서 보기 클릭!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독교 콘텐츠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각자 바쁜일로 잠시 중단이 되었다. 다시 콘텐츠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채널 좋아요~ 구독~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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