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예배 / 이상억목사님
무명의 그리스도인
(창세기 15:1~2, 24:63~65)
창세기 15:1~2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창세기 24:63~65
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64.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65.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대림절 기간, 성탄절 : 우리 입장에서는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슬픈 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아프셨고, 슬프셨을 것 같습니다.
다메섹의 엘리에셀
엘리에셀은 창세기 15장에 딱 한 번 등장합니다.
24장에서는 늙은 종으로 표현됩니다.
엘리에셀은 다메섹 출신이었습니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은 유프라테스강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하여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다메섹 출신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문화적 사회적인 부분에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4장)
롯의 가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아브라함이 잘 훈련된 군사 318명을 데리고 구하러 갑니다.
당시 아브라함 가문 숫자가 대략 1000~2000명가량 정도로 세력 있는 가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가문을 관리했던 사람이 엘리에셀입니다.
하나니이 아브라함에게 후사가 있을거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의 상속자가 있다면 다메섹의 엘리에셀이라고 할 만큼 아브라함에게 신뢰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신뢰를 받는 사람이라면 욕심이 있을 법도 합니다.
그런데 엘리에셀은 그 사람의 이름이 사라졌다는 성경의 기록처럼 자기를 드러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먼길을 떠났을 때,
(본문 창세기 24:65) 리브가가 이삭을 가리켜 누구냐고 했을 때, 엘리에셀은 "내 주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역할과 일을 충직하게 해내고, 그저 아브라함에게 종이었던 것처럼 이삭에게도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무엇일까요?
무명의 삶이 아닐까합니다.
유명의 세상에서 무명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걸어갈 때 길이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어디서나 예배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바돌로메
구약에 엘리에셀이 있다면 신약에는 바돌로매가 있습니다.
바돌로매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바 돌로매 → 돌로매의 아들
12제자의 이름이 등장할 때, 빌립과 바돌로매라고 등장을 하는데,
바돌로매는 빌립이 전도한 사람이라 추정됩니다.
빌립이 전도한 사람은 나다나엘입니다.
나다나엘은 자기의 이름을 지웠습니다.
나다나엘도 갈릴리 출신입니다.
별 볼 일 없는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게 나겠냐고 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도 보지 못했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했던 것을 알아주심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우고 돌로매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랍나라 쪽으로 복음을 들고 예수를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복음을 들고 있고, 칼을 들고 있습니다.
칼을 왜 들고 있는 걸까?
: 이란에서 순교당했다고 전승되는데, 복음 전할 때마다 저 칼로 살가죽을 벗겼답니다. 자기의 가죽을 벗겼던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자기 이름을 지우고 그저 순례객으로 살고, 하나님나라에서 영광의 면류관 받으면 되지 하며 살았습니다.
책: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 작가 무명의 그리스도인
후에 사람들이 진짜 저자를 찾아냈습니다.
저자는 앨버트 어니스트 리처드슨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어떤 공간과 어떤 시간이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변화됩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기도는 요술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시간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지혜와 뜻을 발견하는 시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엘리에셀, 바돌로매, 무명의 그리스도인
무명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처럼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삶에서 어렵고 당혹스러운 일들이 터질 때에도 그저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 "무명시인의 기도"
내 이름 앞에 '유명'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아도
손톱만큼도 눈곱만큼도
서운해하지 않기를
남들이 몰라주는
이름 없는 시인이라는 것을
시를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핑계로 삼는 일이 없기를
한낱
무명시인인 까닭에
내가 쓰는 시는 오히려
거짓 없는 진실에 더욱 가깝기를
→ 한낱 무명 성도인 까닭에 내가 드리는 예배가 거짓 없는 진실에 더욱 가깝기를…
"호호바"
호락호락하지 않은 바보
그리스도인은 바보입니다. 그러나 호호바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찬송가 438장)
C.F.Butler 작사 / J.M.Black 작곡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의 얼굴 뵈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그저 이름 없이 그리스도인이 산다는 것은...
생각해 봅니다. 가정이든 학교든 교회든, 내가 한 수고와 관심과 열심에 대해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기운 빠지는 일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무명으로 살아야 함을 값없이 빛없이 살아야함을 압니다.
그러나 진짜 어렵다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나도 모르게 행한 행동들로 인해서 후회도 많이 합니다.
하루하루 신앙의 날이 더해갈 때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산을 넘어가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면 조금은 덜 어렵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명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거짓 없는 진실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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